히말라야 설산을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웠다. 발아래 깔린 눈은 매서운 바람에 얼어붙어 있었고, 숨을 내쉬면 입김이 순식간에 서려 얼음 결정이 되어 흩어졌다. 나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등반로드의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번 등정은 특별했다. 단순히 정상을 정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지난번 원정대에서의 아픈 기억을 떨쳐내기 위한, 나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여정이었다.
"잠깐만 쉬어가요."
내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나보다 열 살 어린 동료 승우의 것이었다. 그의 얼굴은 추위에 벌게져 있었고, 눈썹과 속눈썹에는 하얀 서리가 앉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위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이 조금 덜한 곳이었다.
승우는 배낭에서 보온병을 꺼내 뜨거운 차를 따라주었다. 손이 덜덜 떨리는 나를 보며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형, 괜찮아요? 좀 더 쉬었다 가도 될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높이에서 너무 오래 머물면 고산병에 걸릴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승우의 눈빛에서 무언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평소와는 다른, 무거운 무엇인가가 그의 눈동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승우야, 무슨 일 있어?"
내가 물었을 때, 승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사실... 오르는 길에 계속 생각했어요. 형에게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승우의 목소리는 바람에 흩어질 듯 흔들렸다.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지만, 추운 날씨 때문에 얼어붙은 건지, 감정이 북받쳐 올라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지난번 원정대에서... 제가 형을 살린 게 아니에요."
나는 깜짝 놀라 승우를 바라보았다. 작년 가을, 우리는 K2 등정을 시도하다가 악천후를 만나 중간에 포기해야 했다. 그때 나는 고산병으로 쓰러졌고, 승우가 나를 업고 베이스캠프까지 내려와 생명을 구했다. 그 일로 나는 승우에게 평생의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무슨 소리야? 그때 네가 날 업고 내려왔잖아."
승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사실... 그날 형을 구한 건 민서 씨였어요."
민서.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내 가슴을 예리한 칼날이 후벼파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민서는 우리 원정대의 유일한 여성 대원이었다. 그녀는 항상 밝은 미소로 팀원들을 격려했고,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판단하는 뛰어난 등반가였다. 그녀는 우리 모두의 힘이 되어주었고, 특히 나에게는 든든한 동료이자 친구였다.
"민서 씨가... 형을 업고 내려오다가 눈사태에 휘말렸어요. 저는 그냥... 뒤에서 따라가기만 했을 뿐이에요."
승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그날의 기억을 되짚어보려 했지만, 고산병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아무것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승우가 나를 구했다는 말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왜... 왜 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야?"
내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승우는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민서 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어요. '승우야, 대신... 대신 그 사람을 잘 부탁해.' 그 말을 들은 순간, 저는 민서 씨의 사랑을 깨달았어요. 형을 향한 그녀의 마음을."
나는 눈물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민서는 항상 나를 형처럼 대해주었다. 우리는 단순한 동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이렇게도 깊은 마음이 숨어있었단 말인가?
"민서 씨는... 형이 눈사태에 휘말릴 뻔했을 때,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형을 밀어냈어요. 그 순간을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해요. 민서 씨의 눈빛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승우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이해가 됐다. 승우가 왜 그토록 나를 챙겼는지, 왜 이번 원정대에 꼭 참여하자고 했는지.
"형, 민서 씨의 마음을 전하는 게 제 마지막 임무인 것 같아요. 그리고... 형이 더 이상 위험한 등반을 하지 않았으면 해요. 민서 씨도 그렇게 바랄 거예요."
나는 민서와의 추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들은 내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특히, 우리가 함께 설산을 오르며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날은 등정 첫날이었다. 우리는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첫 번째 캠프 지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민서는 내 옆에서 천천히 걸으며 말을 걸었다.
"형, 히말라야에 오는 게 꿈이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형과 함께 오르게 될 줄은 몰랐네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민서야, 너랑 같이 오르니까 마음이 든든하네. 네가 있으니까 더 힘이 나는 것 같아."
민서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그녀의 미소는 히말라야의 눈보다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형, 저도 형이 있어서 든든해요. 항상 형을 보면서 용기를 얻었어요."
나는 그녀의 말에 고마움을 느꼈다. 민서는 항상 나를 믿어주고, 나를 지지해주었다. 그녀의 존재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설산을 오르며 이야기를 나눴다. 민서는 자신의 꿈과 희망을 말해주었고,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히말라야의 바람보다도 부드럽고 따뜻했다.
"형, 저는 등반가로서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어요. 히말라야는 단순히 높은 산이 아니에요. 사람들의 꿈과 희망이 담긴 곳이에요."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민서의 마음속에는 항상 사람들을 위한 사랑이 가득했다. 그녀는 단순히 등반가가 아니라, 진정한 리더였다.
우리는 첫 번째 캠프 지점에 도착했다. 민서는 배낭에서 보온병을 꺼내 뜨거운 차를 따라주었다.
"형, 추우시죠? 이거 드세요."
나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받았다. 민서는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고마워, 민서야. 너도 많이 마셔."
우리는 차를 마시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히말라야의 밤하늘은 별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민서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 저 별들 보세요. 저기서 민서가 형을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
나는 그녀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민서의 순수한 마음이 나를 감싸는 것만 같았다.
"민서야, 너랑 같이 있으니까 마음이 편안해. 고마워."
민서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눈빛에서 무언가 특별한 것을 느꼈다. 민서의 마음속에는 나를 향한 깊은 사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는 그날 밤을 함께 보냈다. 민서와 나눈 이야기들은 내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의 사랑은 히말라야의 눈보다도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보라가 잠잠해진 틈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 순간, 민서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하늘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아요.'
"승우야, 고마워."
나는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승우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내려갈까요? 민서 씨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나는 마지막으로 정상을 바라보았다. 눈과 하늘이 만나는 그 끝자락에서, 민서가 손을 흔드는 것만 같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배낭을 메었다.
내리막길은 오를 때보다 더 힘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승우와 함께였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는 민서가 함께하고 있었다. 히말라야의 바람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천천히 내려가며 민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승우는 민서가 나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말해주었다. 나는 그동안 눈치채지 못한 민서의 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의 사랑은 눈보라 속에서도 따뜻하게 내 안에 남아 있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을 때, 나는 승우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리고 민서의 마음을 전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했다. 승우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꼭 안아주었다.
"형, 이제는 민서 씨의 마음을 안고 살아가요.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승우의 말에 동의했다. 히말라야의 설산은 여전히 높고 험했지만, 내 마음속의 눈보라는 이제 잠잠해졌다. 민서의 사랑은 영원히 내 안에 남아, 나를 따뜻하게 감싸줄 것이다.
우리는 베이스캠프를 떠나기 전, 민서를 기리는 작은 추모식을 가졌다. 그녀가 좋아하던 꽃을 눈 속에 묻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승우와 나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민서의 사랑을 기리며 히말라야를 떠났다.
이제 나는 새로운 길을 걸어가야 했다. 민서의 사랑을 안고, 승우와의 우정을 지키며, 더 이상 위험한 등반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히말라야의 설산은 나에게 사랑과 희생, 그리고 용서를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민서의 마음속에 담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히말라야를 바라보며 속으로 말했다.
"민서야, 고마워. 이제는 내가 네 마음을 안고 살아갈게."
그 순간,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와 내 얼굴을 스쳤다. 마치 민서가 나를 어루만져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승우와 함께 새로운 길을 걸어갔다. 히말라야의 설산은 여전히 높고 아름답게 서 있었지만, 이제는 그곳이 나의 마지막 등정이 될 것임을 알았다. 민서의 사랑이 나를 지켜주고, 승우의 우정이 나를 이끌어줄 것이다.
히말라야를 떠난 후,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승우와 함께 우리는 민서의 이름을 딴 등반 학교를 열었다. 그녀의 꿈이었던 대로, 우리는 젊은 등반가들에게 안전과 사랑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민서의 사랑은 이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숨쉬고 있었다.
어느 날, 승우와 나는 민서의 묘소를 찾았다. 그녀의 묘비 앞에 서자, 승우가 말했다.
"형, 민서 씨는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민서의 묘비에 손을 대었다. 차가운 돌이지만, 그 속에서 민서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민서야, 우리 잘 지내고 있어. 너의 사랑 덕분에, 우리는 더 강해졌어."
승우와 나는 민서의 묘비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녀의 사랑은 이제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민서야, 고마워. 이제는 내가 네 마음을 안고 살아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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